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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칼럼] 역사의 흐름을 바꾼 1표의 위력

주필 김진하 목사/평앙노회 증경노회장, 예수사랑교회 주필/김진하 목사l승인2018.09.05l수정2018.11.0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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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주필 김진하 목사(평앙노회 증경노회장, 예수사랑교회)

유권자가 행사한 한 표의 힘이 얼마나 될까? 한 표의 행방에 따라 바뀌어진 역사의 운명을 보면 한 표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알래스카는 미국이 1867년 720만 달러에 러시아로부터 매입하여 미국 땅으로 편입되었다. 원래의 땅 주인이었던 러시아는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알래스카를 미국에 비싸게 팔았다며 자축연을 벌였고, 얼음 땅을 산 앤드류 존슨대통령과 시워즈 국무장관은 어리석은 짓을 했다며 온갖 여론의 집중 포화를 받아야만 했다. 여론이 악화된 상태에서 실시한 매입 비준을 위한 상원의 투표에서 천신만고 끝에 1표차로 간신이 매입 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아무 쓸모도 없는 동토의 땅을 고가로 매입하여 예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탄핵안이 발의되었다. 그 탄핵안은 상원에서 단 1표차로 부결되었지만 존슨은 이후 재선에도 실패했고, 슈어즈 국무장관도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미국이 사들였던 땅 알래스카는 전 세계 금 매장량의 28%, 석유 매장량의 35%, 우라늄 매장량의 30%가 묻혀있고, 그 밖에도 다양한 천연가스와 주석, 니켈 등 귀한 자원들이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고, 산림자원과 수산 자원이 풍부한 보물의 땅 덩어리였다.

1889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상징물을 만들기로 하고 이를 공모하였다. 공모에서 에펠의 작품이 당선되었다. 파리 외곽 나대지를 20년간 임차하여 상징물을 만들었다가 그 후 철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예술의 도시인 파리에 철골 구조물로 만들어진 에펠탑을 설치하게 되자 시인 베를렌과 소설가 모파상 등이 앞장서서 설치를 반대하였다. 에펠탑 건립 11년째 되던 해에는 “에펠탑 철거를 위한 300인 선언”이 발표되면서 에펠탑의 철거와 보존의 결정은 대법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대법원에서 단 1표 차이로 보존에 손을 들어줌으로 인해 오늘날 파리의 명물이며 유럽의 지붕이라고 하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까지 주어진 것이다.

1919년 1월 독일에서는 독일 노동자당이 결성되고 1921년 7월에는 임시 당 대회에서 히틀러의 독재적인 지위가 확립되었다. 히틀러는 1923년 8월 23일 단 1표 차이로 당수로 선출되었다. 만약 그 1표 차이로 히틀러가 나치당의 당권을 장악하는데 실패했다면 아마도 유럽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고, 비명에 사라져 갔던 유태인 600만 명의 학살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625년 왕위에 오른 찰스 1세는 의회를 철저히 무시하고 사치를 일삼음으로 국고는 바닥났고 무자비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1628년 의회는 찰스 1세에게 “권리 청원”을 제출했다. 의회의 허락 없이는 세금을 부과할 수 없고, 법적인 근거 없이는 체포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왕은 약속을 파기하고 다시 의회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또한 찰스 1세는 장로교를 믿는 스코틀랜드에 성공회를 강요함으로 인해 이윽고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왕은 국민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사실을 깨닫고 일단의 무리들과 함께 런던을 빠져나가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1642년에는 끝내 내란이 일어나고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전쟁을 치르게 된다. 8년간에 걸친 이 내전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부른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지만 곧 체포되어 왕의 처리를 놓고 투표결과 68대 67, 단 1표 차이로 사형이 결정되었다. 찰스1세는 1649년 1월 ‘인민의 적’이라는 죄목으로 궁전 앞에서 처형되었다.

18세기 프랑스 시민들은 엄청난 세금 폭탄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1789년 마침내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에 전쟁 정보를 빼돌리고 프랑스를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루이 16세와 왕비 앙트와네트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혁명의 고삐를 쥔 세력들이 장악한 의회에서 왕의 처형에 대하여 온건파와 급진파가 열띤 찬반 공방을 벌인 결과 1793년 1월 21일 361대 360 단 1표 차이로 처형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콩코드 광장에서 루이 16세와 왕비 앙트와네트는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단두대로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1794년 300개의 연방 법률안을 영어와 독일어로 반포하려는 미국 하원의 표결이 찬성 41표, 반대 42표로 부결되었다. 영어가 미국의 국어로 단독 지정된 것도 이때 1표 때문 이었다.미국 건국 당시에는 독일계 주민이 잉글랜드계 주민보다 훨씬 많았다. 따라서 1표 차의 투표 결과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미국의 국어는 영어와 독일어를 병행하거나, 독일어였을지도 모른다.

1843, 5월 2일 미국의 워싱턴, 오리건, 아이다호의 미국 편입 여부를 위한 찬반 투표를 실시했으나 의견이 51:51로 양분되어 결정이 나지 않았다. 재투표를 실시한 결과 1명이 찬성으로 기울어 52:50 이 됨으로 인해 미국의 주로 편입되었다. 텍사스도 상원의원들이 26 대 26으로 팽팽하게 맞서다가 한 의원이 마음을 돌려 27:25로 아슬아슬하게 가결되어 미국의 땅이 되었다.

1800년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과 에린 버는 선거인단 득표에서 각각 73표로 동점이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은 자가 없을 때는 결선 투표를 통해 당선자가 결정된다. 의회에서는 결선투표를 무려 36차례나 실시하였으나 계속 동점이었다. 이후에 테네시주의 클레아본 의원이 마음을 바꿔 던진 한 표로 인해 제퍼슨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1876년 헤이즈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민주당 틸덴과 경쟁하게 되었다. 선거인단 표에서 185대 184로 민주당의 틸덴 후보를 단 1표 차로 누르고 공화당의 헤이스가 당선되었다.

이외에도 1839년 몰튼은 1표차로 메사츄세츠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미국의 켈소 후보는 클락이라는 중환자가 은혜를 입고 아픈 몸을 이끌고 가서 투표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 1표 때문에 상원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다.

한 주 후면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 103회 총회가 대구에서 열린다. 총회를 섬기고, 교단을 바르게 세워보겠다며 저마다 출마의 변을 토하고 있다. 그동안 십 수 년 간 제비뽑기로 요행수를 기대했었지만 이젠 완전 투표방식으로 돌아왔다. 총대 한 사람, 한 사람이 행사하는 한 표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주필/김진하 목사  pastor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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