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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대교회, 3·1 운동 참여교회로 공식 인정

위계후 조사 중심으로 만세운동 영광에서 세 차례 구인본 편집국장l승인2019.03.14l수정2019.05.1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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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대교회 김용대 목사

예장합동(총회장:이승희 목사) 광주 영광대교회(김용대 목사)가 총회로부터 3·1 운동 백주년을 기념해 참여교회로 공식 지정을 받았다.

“영광대교회 위계후 조사(助事)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1919.3.14~15)이 영광에서 세 차례 이뤄지다”

영광대교회는 1905년 5월 7일 미국 남장로교 배유지(Eugene Bell)선교사의 전도 열매로 영광읍 무령리에 세워졌다. 설립 114년이 되는 교회로서 한국교회 역사의 초창기 기억부터 소중히 간직한 교회이다. 영광대교회가 3.1 운동 참여교회(100주년 기념)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영광 지역의 자랑이고 긍지이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났던 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총회에서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교회로 영광대교회가 지정된 것은 일제 식민치하에서 민족애를 깨우고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영광 지역의 선각자들이 바로 기독교 신앙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 20세기는 식민지, 남북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혹독한 시련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기독교 신앙은 한국인들에게 널리 수용되었으며, 오늘날 기독교는 한국 민족의 본질적인 부분에 속하게 되었다. 지난 한 세기의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회는 정치적 상황의 한복판에 서서 선교활동을 전개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회 정치적 기능에서 볼 때, 기독교는 한국인의 고난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영광의 기독교 전래 이후 그 성장의 이면에도 이런 아픈 민족사의 역사와 함께 하듯이 영광의 기독교 전래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의 기독교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민족의식이 강하고 자발적인 의지를 가진 지역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무령리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영광대교회는 이후 영광읍교회라는 이름을 쓰다가 2002년부터 지금의 영광대교회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영광대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외부와의 정보교환을 위한 거점 및 연락망의 역할, 지역민들을 위한 근대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간이학교 및 주일학교 운영 그리고 부흥회 및 사경회 개최, 민족문제에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지역민들의 본보기 역할 등을 했다. 이와 같이 지역사회에서 영광대교회 교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원칙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 예를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 때 교회의 조사(助事, helper)(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직분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선교초기에 한국인 목사가 양성되지 못할 때 선교사들을 도와서 전도, 치리, 순회심방 등을 했다)로 시무했던 위계후(魏啓厚)를 중심으로 1914년 기독교를 통한 배일(排日)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기독인을 중심으로 민족의식 교육으로 펼친 항일운동은 영광보통학교 생도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 3월14일과 15일에 영광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순수한 신앙의 열정들을 키워왔다. 

위계후 조사는 담양 출신으로 담양군 창평면 정오리가 그의 고향이다. 그는 광주 농업학교를 다니면서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졸업(제1회 졸업)한 후 1914년 나이 30세 때에 영광에 와서 영광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였고, 1915년 10월 5일 당시 영광읍교회 지금 영광대교회의 조사(助師)로 시무하였다. 그는 또한, 강한 민족애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1905. 11. 17)과 1910년에 공포 되었던 ‘한국합병에 관한 조약’(1910. 8. 22. 조인, 동 29일 공포)에 의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곳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1919년 3월 1을 기해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광에서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는 그 당시 교인들에게 기독교를 통한 나라사랑과 독립사상의 고취 및 배일(排日)사상을 심었으며,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불어 넣어 이로 인해 영광에서도 3월14일과 15일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는데, 1919년 3월 14일 영광공립보통학교 학생 120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조철현(曺喆鉉), 영광공립보통학교 교사 이병영(李炳英), 영광공립보통학교 학생 정헌모(鄭憲模)·허봉(許奉)·조술현(曺述鉉) 등이 주도하였다. 영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학교를 출발, 도동리 남단(현 군내버스 정류소)을 돌아 영광경찰서로 향하던 중 남천리 조철현의 정미소 앞에서 경찰과 충돌, 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서울에서 점화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전남 지역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3일이었으나, 만세 시위는 3월 10에 광주에서 있었다. 광주에서는 미션계 학교를 중심으로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농업학교 등 3개 학교 학생이 주축이 되어 확산되었다. 영광에서는 군 단위에서는 최초로 3월 14일에 일어났고, 영광읍에서만 3회의 시위 운동이 있었다. 이 만세운동을 지휘했던 분이 바로 영광대교회를 시무했던 "위계후(魏啓厚)" 조사였는데 고경진(高暻鎭)과 함께 고장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무지하고 몽매한 사람들을 일깨우는데 힘썼다.

영광지역 3·1운동 당시 정신적 구심 역할을 한 위계후의 아호(雅號)는 해인(海人)이다. 위계후 조사는 친외가의 당숙인 고하 송진우와 창평 고직각의 사위인 인촌 김성수와도 교분을 맺어 서로 뜻을 같이하는 사이였다. 이를 계기로 영광에서의 항일운동을 당시의 기독인들이 주도해 갔다. 

또 영광대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되어 고통당했던 김방호 목사와 편진옥, 노동악등의 신앙의 절개를 지켜나갔던 값진 교회이다. 특히 김방호 목사는 이후 교회를 사임하고 염산교회에서 시무하다 한국전쟁을 맞아 그의 가족과 함께 순교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교회가 불탔고 성도중 이광연 집사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폭도들에 의해 죽창과 몽둥이로 살해된 후 시체는 법성 앞바다에 버려지는 순교를 당하기도 했다. 순교자의 피와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는 노력이 지금의 영광대교회가 있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보며 전국의 읍단위 교회로는 그 규모나 교세로 전국에서 제일 앞선 교회이다.

이제 영광대교회의 114년의 역사는 영광군이 갖게 되는 사회적 자본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겠다. 이는 기독교가 20세기 격동하는 시기에 민족의 아픔과 함께 지역민들에게 종교적 사랑으로 선교되어 왔음을 부인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영광이라는 지역과 협력적 행위를 촉진시켜 기독교가 사회적 효율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회적 신뢰였고 규범이었고 네트워크의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고 기독교의 속성상 영광 땅을 변화시킬 사랑의 원자탄이기에 더욱 그렇다. 

구인본 편집국장  akib@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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