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설위원/김진하 목사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는 영국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칼레 사람들은 시민군을 조직하여 영국군에 맞서 싸웠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식량이 고갈되어 끝내 항복을 하고 말았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항복 조건을 내걸었다. 칼레의 시민들 중에서 6명을 뽑아 와라.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해 그들만을 처형하고 마무리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칼레의 갑부였던 ‘외스타슈 생피에르’를 비롯해서

고위 관료와 부유층 인사 6명이 자원을 했다. 이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에 자루 옷을 입고 영국 왕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임신 중이던 영국 왕의 아내가 처형을 만류했다. 이들을 죽인다면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왕은 고심 끝에 이들을 풀어주었고 6명의 시민은 칼레의 영웅이 되었다. 이것이 가진 자의 의무를 상징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탄생한 배경인 것이다. 희생을 각오한 단 6명의 지도자가 칼레를 구한 것처럼 리더는 희생과 나눔을 의무로 여겨야 한다. 자신을 태우고, 나를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비장한 결단이 없는 한 생명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나라의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왕도 왕비도 비운에 사라졌다. 말도 빼앗겼고, 이름조차도 일본 이름으로 개명을 해야 했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위아래를 다 살펴보아도 이 나라에는 절망이라는 단어밖에는 남은 게 없었다.

그러나 이때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한 이들이 있었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시베리아 만주 벌판에서, 연해주에서, 북경에서, 독립군을 결성하고 그리고 상해에서는 임시정부를 만들어서 일본에 대항했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할빈역에서는 적장의 가슴에 총탄을 퍼 부었고, 상해의 공원과 일본 의사당에는 폭탄을 투여하고, 네델란드 헤이그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던진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꼭 100년 전인 1919년 종로의 탑골공원에서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침으로 그 메아리는 전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기개와 단합된 힘이 있었다. 가진 자, 힘이 있는 자가 팔짱을 끼고 관망만 하고 있다면 그건 희망이 없는 일이다.

요즈음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꿈을 묻는다면 한결같이 연예인이 되고 싶고, 연기자, 가수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 아마도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K-pop 의 인기나 유명인들 때문일 것이다. 멀리서 바라본 그들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우상들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 주변의 일그러진 영웅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곤 한다. 가진 자, 소유한 사람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못한 채 사회의 지탄거리로 전락하거나 암적 요소가 된다면 우리 모두의 불행이 되고 말 것이다.

가진 자였던 아브라함은 어려운 처지를 당한 혈육과 이웃을 돕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했다. 개인적으로 소유한 사병 318명을 동원하여 연합군을 결성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주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용어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희생과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베들레헴 우물가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치루던 다윗의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뜨거운 대낮에 적과 대치하던 다윗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이 말라 독백을 하고 있었다. “누가 저 영문 밖의 우물물을 마시게 할꼬?” 물론 이 말은 누군가가 듣고 가서 그 물을 길어오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무심코 내 뱉은 신음소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심복 세 사람이 적진을 향해 뛰어 나가 순식간에 우물물을 한 바가지 길어왔던 것이다. 이 물 한 바가지는 하나님께 부어졌지만 모든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해졌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승리였던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백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도성인신 하셔서 마땅히 죽어야할 인간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려 돌아가신 사건이다. 누가 이 시대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될 것인가? 니느웨 성을 위해 요나가 ‘노블레스 오블리주’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성읍을 위해 우리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