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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기도, 돌아갈 품으로의 회귀

[Ku마태여행스케치/갈릴리예수를 찾아] 대표/발행인 구인본 목사l승인2019.05.13l수정2019.09.0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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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발행인 구인본 목사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돌아갈 수 있는 품이 있다’는 것이다. 탕자는 그러한 원리를 십분 활용했다. 궁극적 기도의 내용과 지향점은 일명 ‘황금률’(Golden Rule)이어야 한다. 인간적 지평에서 조명할 때 다소 가혹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를 촉구하는 주님 되는 하나님의 초지일관된 뜻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당대 기성 종교제도권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예수는 협소한 회당을 벗어나 노천 집회를 개최했다. 하늘을 지붕 삼아 산에서 일명 산상수훈이라 일컬어지는 황금률을 설파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 출신성분은 제자들과 같은 수준의 부류인 당대의 ‘암하레즈’ 즉 ‘땅의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무지렁이들이었다. 그들은 사회의 가장자리·주변부로 밀려난 밑바닥·허드레·하루살이 인생들이었다. 그들은 자포자기적 넋두리 속에서 하루의 일상이라는 한계적 지평만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의 시혜 대상뿐이라는 위상만 지닐 뿐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위상은 대부분 출세의 동아줄 또는 경제 문제 해결사였다. 하여튼 조용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다가온 예수의 황금률은 그들의 가슴에 화살촉처럼 박혔다. 왜곡된 율법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었던 당대 무지렁이들의 지병인 종교적 가슴속 무좀 앓이는 예수의 예사롭지 않은 새로운 개념의 선언으로 인해 치유가 되기 시작했다.

황금률은 당시 민중들에게 무한궤도의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러한 지향을 담보하고 살아가기를 강력하고도 진지하게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은 “황금률은 천국에서나 구현 가능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황금률의 삶을 내면화하고 체질화해서 천국시민의 자질과 수준과 소양을 피안(彼岸)이 아닌 차안(此岸)에서 학점을 이수하고 담보해 내기를 간절히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마음의 오염원을 제거해 죄악의 진공 상태를 지향하는 자이다. 인간은 깨어진 거울 조각과도 같이 불완전하고 죄악 가운데서 출생했다.

‘애통하는 자’는 비관주의나 우울증도 아니고 또 고통이나 견유철학도 아니다. 인간은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것이 아닌, 경박하고 조야(粗野)하고 피상(皮相)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것에 집착할 때 그러한 현상에 대한 상쾌한 슬픔을 생산해 내야 한다.

‘온유한 자’는 유약한 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과 디자인 앞에 무릎절을 하고 자신을 무장해제 시킴을 말한다. 하나님 섭리에 대해 물을 투과시키는 자갈밭이 아니라 해면(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자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정신적 기만적인 만족과 교만한 포만감으로부터의 일탈이다. 주님은 포만감에 도취된 자는 공수로 보내고 공복감 해소를 원하는 자에게는 천국의 곡간을 개방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타인을 경쟁자로 보지 않고, 내 손과 내 발을 빌려줄 형제라고 생각한다. 수직적 관계의 시혜와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평등한 수평적 관계의 나눔의 대상이다. ‘거룩한 소비’가 그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투명한 수족관을 말한다. 개방하고 노출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다. 개방하는 자는 떳떳하고, 은닉하는 자는 비도덕적 음모와 계략과 노림수로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갉아먹는 자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양보를 통해 다름과 차이를 뒷전으로 물리고 공감대와 공통점을 찾아 부각시키고, 확대재생산 해서 ‘하나 됨’을 추구하는 자다. 중상모략이 서식할 생태계는 절대 아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신앙의 최고봉이다. 순교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야 될 당위성이 절박한 신앙의 절개 수호를 위한 막다른 골목에 처할 개연성이 다분하다.

황금률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의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청이자 기독교 진리가 도전받고 있는 이 시대의 절박한 기도 주제이다.

기도하지 않는 개인과 공동체에는 그 어디에도 희망과 탈출구는 담보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인내를 의도적으로 시험하는 자에게는 이런 고백만이 예상된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후회’라는 어휘가 갖는 특징은 상황이 종료된 후 ‘나중’이라는 것이다.

고된 인생사로 인해 엔진의 동력이 소진된 자들이여!

‘돌아갈 수 있는 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슴에 부적(符籍)처럼 간직하기 바란다.

대표/발행인 구인본 목사  akib@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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