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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막 5:1~3

박용규 목사/증경대구중노회장, 총회실행위원, 가창교회, 박용규 목사l승인2019.09.21l수정2019.09.2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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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규 목사

마태복음 5~7장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삶의 윤리와 책임에 대한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으로 불리어지는 말씀의 첫 번째가 팔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많이 읽기도 하고 들었던 말씀이지만 그 말씀 속에 담겨있는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성경에 대한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물론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지만, 무조건 성경을 기계적으로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경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말씀 속에 담겨있는 의미와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가게 될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성도들은 ‘어떻게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 수 있어’, ‘그 요구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지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당시 수많은 무리에게 선포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 1절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구별하셨습니다. 여기서 무리들은 수많은 군중들입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능력을 보기 위해서 따라온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팔복에 관한 모든 말씀들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행동보다 내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팔복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보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행복의 근원이 되시고 진정한 복은 이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복이다’고 합니다.
진정한 복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복에 대해서 깨달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그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신령한 복, 성경이 가르치는 복에 대해서 믿음의 눈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적 무능력을 인정하라.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은 부해지고 권력을 소유하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본문을 오해하면 가난해지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프뉴마)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프토코이)은 아무것도 없는 극빈한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 말씀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요해도 마음이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심령의 가난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필요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충당할 수 없는 자입니다. 마치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 의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욕망, 욕구도 없이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대충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적인 능력이 부족해서 마음이 비워져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무능력입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회복이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사용하는 걸레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세탁한다고 해서 새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3장 10~12절에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죄로 인해서 타락한 모든 인간들의 상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것은 치장한 겉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마음, 생각과 골수를 뚫어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간이 이런 상태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얼마나 영적으로 무능력한 자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무능함을 깨닫게 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 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는 광야로 도망 와서 40년간 살았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풀 한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호렙산에 떨기나무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시다”고 하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 능력을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본래 말을 잘 못하는 자입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 고 고백합니다. 모세가 능력, 지혜가 없어서 입니까? 그의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자신이 영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신은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쓰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긍휼이 아니면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할 때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 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특징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갈급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시편 42:1) 그러나 배부른 심령은 어찌합니까?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불행이 무엇입니까? 너무 가진 것이 많아서 너무나 이 세상의 것을 채우기 바빠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시편 146편 5절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영적으로 파산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채워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도 가난한 마음으로 나와야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집니다. 가난한 마음은 우리의 공로를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십자가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이 소원하는 것을 얻어내느냐? 하는 싸움을 합니다. 그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제물을 바칩니다. 자신이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 자격, 조건을 갖추면 된다고 합니다. 그 자격이 조금 부족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며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신실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자신의 가치, 영광, 축복을 자신이 지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지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목적을 위해서는 현실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위기를 맞게 됩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교회 속에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욕심과 소원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주님의 교회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자신의 소원과 욕심을 내려높고 자신의 영적 무능력을 인정하고,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간구할 때에 은혜와 진리가 채워지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복을 누리라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고 합니다. 천국,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의 머릿속에서 당장 바꿔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으로 생각해야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천국, 하나님 나라를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신 최대의 핵심 메시지는 천국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의 최대의 메시지는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신약성경의 메시지는 이 땅에 임한 천국,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표현은 너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자리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천국,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물론 천국,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야할 미래적 의미가 있지만 현재적 의미를 더 강조합니다. 즉 우리 속에 임한 하나님 나라,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경험합니까? 우리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면 내 안에 천국,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 천국을 개인의 내면세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이요 우주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적싸움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주인으로 믿느냐?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역사적 사실이며 객관적인 진리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나의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너희 가운데 있다, 너희들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심령 속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으로 부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 속에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이 있을 때에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적 무능력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가난한 심령이 될 때에 하나님 나라, 천국을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허락해주시는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는 항상 이러한 역설이 있습니다. 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주어집니까? 왜 이러한 패러독스, 역설이 우리에게 들려집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시간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아직도 세속 욕망을 위해서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 천국을 경험하지 못했느냐? 죽어서 가는 천국만 생각하고 있느냐? 지금 임할 천국을 경험했느냐? 고 물으십니다.
천국,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자신의 영적 무능력을 인정하고 내가 주인 삼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빈 마음, 가난한 심령으로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통치, 우리 심령 속에 임한 천국을 누리게 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시편 34편 6절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고 말합니다. 곤고한 자는 ‘가난한 자’란 뜻입니다. 가난한 자, 곤란에 처한 자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나를 구원하셨도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곤고한 자, 비천한 자, 가난한 자가 두 손 들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은혜를 구하는 것이 천국을 소유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처럼 ‘나처럼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세요’ 하진 않습니까? 가난한 심령이 아닌 화려한 치장으로 덮인 종교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착각하고 있진 않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의 축복은 “오! 주여! 저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인생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이 있을 때 천국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으시면 한순간도 살 수 없다고 하는 절박함이 있을 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신령한 축복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용규 목사  pyongg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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